[천자칼럼] 승자의 저주

입력 2023-12-19 17:44   수정 2023-12-20 00:17

1950년대 미국에선 석유 시추권 확보 경쟁이 불붙었다. 멕시코만 등에 상당한 석유가 매장돼 있을 것이란 예상에 정유사들이 앞다퉈 입찰에 뛰어들었다. 요즘이야 기술 발전으로 정확한 매장량 측정이 가능하지만, 당시엔 막상 시추해보면 기대만큼 석유가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고 입찰에서 승리했는데도 결국 큰 손해를 보는 정유사가 줄을 이었다. ‘승자의 저주(winner’s curse)’라는 말은 미국 석유회사 애틀랜틱리치 소속 엔지니어 3명이 시추권 입찰 과정에서 두드러진 이런 현상을 한 논문에 서술하면서 처음 등장했다.

최근엔 기업 인수합병(M&A)과 연관돼 승자의 저주가 주로 사용된다. 성장동력 확보, 시너지 확대 등을 노리고 M&A에 나섰지만, 과도한 대가를 치른 탓에 심각한 후유증을 겪는 상황을 의미한다. 국내외에 사례가 즐비하다. 영국 스코틀랜드왕립은행(RBS)이 2007년 10월 네덜란드의 ABN암로은행을 인수한 게 대표적이다. 인수금액만 무려 710억유로에 달한 세계 금융 역사상 최대 M&A였다. RBS는 경쟁사인 바클레이스보다 35억유로나 더 많은 금액을 제시해 승리했지만, 고가 인수에 따른 부담에 미국발 금융위기까지 겹치면서 결국 영국 정부로부터 200억파운드의 공적자금을 수혈하는 신세가 됐다.

승자의 저주는 경영진의 자기 과신, M&A 대상 기업 가치 및 시너지 과대 평가, 적정 가격 이상의 베팅 등이 맞물린 결과다. 국내에서도 무리한 인수가 그룹 해체를 촉발한 사례가 있다. 옛 금호아시아나그룹의 대한통운과 대우건설 인수, 웅진그룹의 극동건설 인수 등이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한화그룹이 2008년 대우조선해양을 6조3200억원에 인수하려다 포기하지 않았다면, 현대산업개발이 2020년 아시아나항공을 그대로 품었다면 어떤 위기에 빠졌을지는 명약관화다.

오랜만에 초대형 딜이 마무리됐다. 하림그룹이 6조4000억원에 HMM을 품었다. 김홍국 회장은 인터뷰에서 일각의 우려에 대해 “승자의 저주는 없다”고 단언했다. 그의 장담이 틀리지 않기를 바란다.

류시훈 논설위원 bad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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